“예전엔 한 봉지면 배부르게 먹었는데, 요즘은 두 개는 먹어야 해요.” 편의점에서 과자를 들고 나온 직장인 김모(34) 씨는 같은 가격에 양이 줄어든 사실을 뒤늦게 알고 허탈해했다. 이런 현상을 일컫는 말이 바로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단어는 한국에서도 뉴스 기사와 소비자 커뮤니티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가격 인상을 피하면서도 기업이 이익을 유지하는 교묘한 방식. 그런데 이 ‘슈링크플레이션’이 한국에서만 쓰이는 표현일까? 그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영국에서 시작된 단어…이젠 전 세계의 문제
‘슈링크플레이션’은 ‘shrink(줄어들다)’와 ‘inflation(물가상승)’을 결합한 영어 신조어다. 2009년, 영국의 경제학자 필렙 이네스(Philippe Inman)가 《가디언(The Guardian)》 칼럼에서 처음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에서도 비스킷, 시리얼, 초콜릿 등의 중량이 줄어들고 있었고, 소비자들은 ‘가격은 그대로인데 내용물이 줄었다’는 불만을 쏟아냈다.
그 후 미국, 일본, 호주 등 다양한 국가로 퍼지면서 영어권 경제 기사와 보고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됐다. 한국에서는 약 5~6년 전부터 ‘슈링크플레이션’이라는 음차 형태로 번역·사용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한국소비자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정부 기관도 공식 문서에 이 용어를 활용하고 있다.
겉보기엔 그대로, 속으로는 인상…슈링크플레이션의 실체
슈링크플레이션은 기업이 가격표를 그대로 두면서 제품의 용량이나 크기, 개수를 줄이는 전략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과자가 120g에서 105g으로 줄어들었는데도 가격은 동일하거나, 요거트의 양은 줄고 용기 크기만 유지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원자재나 유통비용이 상승해도 소비자 반발 없이 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지다. 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실제로 단가가 올라간 것이나 다름없다. 더 적은 양을 같은 돈 주고 사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4년 4분기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결과, 국내외 식품 9개 품목에서 이런 슈링크플레이션 사례가 확인됐다. 감귤초콜릿, 유기농 분말, 수입 초콜릿 등 제품군은 다양했고, 용량이 줄었음에도 이를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제품뿐 아니라 서비스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호텔 조식 메뉴가 간소화되거나, 항공사 기내 서비스가 줄어드는 것도 넓은 의미의 슈링크플레이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대응…한국은 이제야 법제화
미국에서는 식품의 용량 축소를 문제 삼아 제조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이 진행되기도 한다. 일본은 기업들이 용량 변경 시 이를 포장에 명시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편이다. “리뉴얼 전보다 작아졌습니다”라는 안내가 오히려 소비자 신뢰를 높이는 전략이 되기도 한다.
한국은 최근 들어서야 제도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24년 8월부터 공정거래위원회는 슈링크플레이션 관련 고시를 시행한다. 이어 2025년 1월부터는 식품의약품안전처와 환경부도 관련 표시 기준을 도입할 예정이다. 기업이 제품의 용량을 줄이면서 이를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으면 과태료나 행정처분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소비자가 이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줄어든 그램 수를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슈링크플레이션은 종종 ‘은밀한 인플레이션’으로 불린다.
“우리가 싸게 사는 게 아니에요. 그냥 속고 있는 거죠.”
소비자들은 가격표만 보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을 따져봐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